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지그문트 3세 바사|시기스문드]]와의 대립 ===== AD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시기스문드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가 로마가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스웨덴의 평의회가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스문드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AD 1593년 웁살라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루터교회]]가 스웨덴의 국교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스웨덴 안에서 다른 종교의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선언했다. 웁살라 종교회의의 결정이 국왕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시기스문드가 스웨덴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로마카톨릭 의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시기스문드가 반발했고 국왕인 자신도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시기스문드는 폴란드 호위병으로 대동하고 스톡홀름에 도착한 후 몇 개의 교회에서 여전히 로마카톨릭식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AD 1594년 시기스문드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웁살라에 도착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계급 대표들의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웁살라 종교회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시기스문드를 압박하였다. 결국 시기스문드도 웁살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했지만 정작 대관식을 치르고 스톡홀름에 돌아오자 계속해서 로마카톨릭 예배를 하고 로마카톨릭 신자를 정부 요직에 배치했다. 시기스문드는 폴란드로 돌아가면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스웨덴 귀족들로 구성된 추밀원(Privy Council)과 함께 스웨덴을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권한을 명시하지 않은 채 오히려 각 지방에 자신의 직속 관리와 조세 징수관을 파견하는 방법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통치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자신을 섭정 임명을 요구했지만 섭정의 권한에 대해서는 귀족들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5년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를 통해 섭정으로 임명받고 시기스문드의 부재시 국왕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 결정에 대하여 이번에도 시기스문드는 국왕인 자신의 승인없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불법으로 규정했다. 스웨덴 귀족들 역시 자신들은 국왕인 시기스문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했다며 협조를 거부했다. 이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신분제 의회의 결정사항이 더 우위에 있음을 내세워 귀족들의 반대를 억눌렀다. 또한 시기스문드로부터 임명받아 스웨덴 해군을 총괄하고 있던 핀란드-에스토니아의 클라우스 플레임이 복종을 거부하자 AD 1596년 핀란드의 외스테르보텐 농민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비록 클라우스 플레임이 봉기를 진압하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제 스웨덴이 국왕인 시기스문드와 섭정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두 편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웨덴 귀족들이 시기스문드의 편에 섰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7년 재차 아드보가에서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여기에 단 1명의 스웨덴 귀족만이 참석했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분노하자 이에 겁을 먹은 수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폴란드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고 클라우스 플레밍의 미망인인 에바 스텐보크가 차지한 오보까지 함락시키며 핀란드까지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